적벽대전 당시 삼국지 조조 100만 병사, 화용도 관우 및 당시 인구 조조는 북방에서 백만 대군으로 남하하며, 손권에게 이런 편지를 쓰죠. "나는 백만 병사와 천명의 장수 인솔하고 강하에서 그대와 사냥을 하고 싶네. 유비를 물리치고 그 땅을 나눠 갖곤 오랜 결맹을 맺음세." 손권은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관련 글업성(업도)에 동작대를 짓고 수도로 삼은 조조 (삼국지 도시)삼국지 인물 공손찬, 용주, 역경루, 계교전투 삼국전戰 vs 원소 上제갈탄 오해-촉은 용 오는 범 위는 개를 얻었다? 삼국지 논쟁◆ 손권, 주유, 제갈량 만남 노숙은 오에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손님을 모셔오는데, 그가 바로 제갈공명입니다. 제갈공명은 조조의 "백만 병사" 라는 말을 운운하며, "조조에겐 청주군 20만..
한나라 선제 시기 下 곽광 지나친 욕심으로 멸족 당하다 전한 소제는 스물한 살에 이르러 병사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유하劉賀(폐위된 창읍왕昌邑王)가 즉위했는데, 방탕하여 도무지 군주의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조야 안팎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곽광이 여러 대신의 위탁을 받고, 또한 양창 등과 연계하여 조회 때에 갑자기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상관 황후의 명의를 빌려 유하의 죄상을 열거하고는 왕으로 강등시키고 식읍 2천 호를 주어 창읍에 살게 했다. 그리고 유하의 졸개들 2백여 명을 모두 저잣거리에서 참수했다. 관련 글한나라 소제 시기 上 권세가 곽광, 황제와 상관걸 사이에서전한 박사 숙손통, 주나라 진나라를 모방해 의례 제작, 한고조 권위 상승1950년대 중국 주은래 기념 사진 [철령(톄링..
갈족 석륵 조나라(후조) 건국, 남북조 시대 성군 등장 [18화] 이즈음, 진나라 유곤은 석륵의 모친과 조카 석호를 얻는다(저족이 하도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살다 보니 이 둘이 어찌어찌 그리하여 유곤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으로 예측됨). 그리곤 이 둘을 송환하면서 장문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장군은 예주와 연주를 석권한 뒤, 강회 일대를 횡행하고 한면(한수와 면수)을 위협하니 .... 유총을 배반하는 것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고 진나라를 좇는 것은 복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당연히 석륵은 무시하고 갈피에서 큰 배를 건조해 장차 『건업을 도모』할 뜻을 비쳤다. 예전 조조가 그러했듯 석륵에게도 불운이 찾아온다. 회수 일대에서 석 달간 장대비가 연이어 내리면서 북방의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렸..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해 유연에게 몸을 맡겼으니 석륵이 큰 인물이라 판단한 유연은 그에게 장군의 직을 내렸고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를 10여 년,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석륵은 유연의 한나라 휘하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나 처음부터 독립할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망을 쌓는 데도 주력했다. 약탈은 물론이고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절대 금했으며 기주를 함락한 뒤에는 군자영을 세워 문인들을 길러냈다. 석륵의 수하였던 장빈도 이런 군자영에 스스로 찾아간 인물이었다. 유총이 황제가 되자 석륵은 다시 정동대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낙양을 칠 때, 양양으로 진격해 장강과 한수 이북의 거점을 얻어냈..
오사카 여행 갔다가 당일치기로 들른 교토 니조성입니다. 니조성 청류원을 지나면 니조성 장벽화 특별 전시회장을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니조성 건축 400주년 기념 특별 전시회였는데 지금도 하는진 모르겠군요. 니조성 장벽화 특별 전시회에는 사진 촬영이 절대 불가한 니노마루 어전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국보급 보물로 분류되는 유물들이라 보존에 각별히 신경쓰는 것들이죠. 이런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곳입니다. 심지어 문짝을 뜯어 통째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걸 이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이죠. 입구 근처에 있는 곳이라 니조성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바로 보입니다. 니조성 입구 오른쪽에 되게 큰 휴게소가 있는데 거기 바로 옆이라 눈에도 잘 띱니다. 워낙에 공개..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광초 2년(319) 여름, 유요는 조서를 내린다. "나의 선조는 북방에서 일어났다. 광문제(유연)가 한나라 종묘를 세워 백성의 뜻을 좇았다. 지금 의당 국호를 바꾸고 선우를 선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호를 조로 바꾼 이후 진창, 초벽, 안정, 농성 등을 함락시키고 관중의 파족, 저족, 강족, 갈족 등을 제압했으며 태학과 소학을 세워 학자들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했고, 궁실을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 중단하기도 했다. 현명하게 내실을 다지던 유요는 광초 8년(325), 드디어 석륵의 조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시작한다. 석륵이 장수 석타에게 명해 상군을 쳐 3천여 명의 포로와 소와 양 등 가축 2만여 두를 빼앗은 것이다. ..
혼자 일본 여행 중 오사카에서 교토로 이동해 니조성 구경했습니다. 위치는 아래 그림처럼 북쪽에 있으며, 북쪽 중간문, 녹색정원 사이입니다. 니조성 청류원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쪽 코스 대신, 청류원 빨리 갈 수 있는 동쪽 코스 선택하는 분들도 많아요. 저는 서쪽 코스를 선택해 니조성 남쪽, 서쪽을 돌아 북쪽 청류원으로 향했습니다. 밟으면 건강에 좋아진다는 돌멩이들을 지나면 교토 니조성 청류원 건물이 담벼락 건너로 보입니다. 아래 사진 오른쪽 위에 보이는 건물이 청류원입니다. 저는 2018년 7월 중순,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닌 한여름에 방문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여름에는 팥빙수를 팝니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청류원 들어가는 문. 건물 2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쪽에선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
화북 쟁탈전 - 유요 근준 석륵 삼국지, 두개의 조나라 [15화] 연이어 적국의 황제 두 명을 사로잡은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총은 이에 더욱더 사치에 힘썼다(?). 수렵하며 술을 마시는 것 외에 그가 즐긴 것은 각 대신의 집을 차례로 돌며 미인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호군 근준의 집에서 그의 두 딸 근월광과 근월화 모두 미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 곧바로 귀빈으로 삼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근월광을 황후로 세웠다. 천하가 한나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한나라엔 건국자 유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다. 왕준, 석륵 등의 대장군들을 조정에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한나라에게 큰 문제였으며, 결국에 해결하지 못했기에 후조가 탄생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총..
작년 7월 교토 여행 중 방문한 니조성입니다. 일본 세계문화유산 니조성 도보 코스 2번째로 소개합니다. 전체 니조성 지도는 다른 포스트[바로가기] 참고해 주시고 이 포스트에선 총 4곳 사진 소개합니다. [일본 세계문화유산 니조성] 동쪽 성문, 당문, 모모야마문남쪽 중간문서남 모퉁이 망루서쪽 다리북쪽 중간문 니조성 바깥 해자를 끼고 걷는 도보 코스는 역사 유적지 탐방보다는 경치 좋은 공원을 걷는 느낌입니다. 외곽이라 볼만한 건물이나 유적지는 없고, 잘 만들어진 조경 구경하기 좋습니다. ◆ 남쪽 중간문 1626년에 지어진 문으로 쇼군, 천황이 머물던 혼마루 궁전으로 가려면, 이곳 남문과 서문을 지나야 합니다. 니조성이라는 유적지 보단 경치 좋은 공원에 온 느낌입니다. ◆ 서남 모퉁이 망루 실제로 망루에 오르..
사마월 진회제 민제 최후, 한나라 유총 사치향락 빠지다 [14화] "지금 호로胡虜들이 낙양 근교까지 다가왔는데 모두 지킬 뜻이 없소. 조정은 모두 그대만을 믿고 있는데 어찌 지금 군사를 이끌고 멀리 출정하겠다는 것이오? 낙양을 포기하려는 것이오?" 진회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월은 석륵을 토벌해 조정의 권위를 다시 세우겠다며 기어코 출병한다. 누가 봐도 임지인 동해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며 낙양은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낙양의 수비병』은 거의 없어지고 기근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마월이 남긴 장수들은 공경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공주들을 능욕하기까지 한다. 진회제는 참을 수 없어 구희에게 사마월 토벌을 명하는 밀조를 내렸고 그나마 사마월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서진의 마지막 숨통은 그의 폭사와 함..
흉노족 한나라 건국, 유총에게 포위당한 서진 진혜제 [13화] 유연으로선 제후왕들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거사를 일으키기 좋다는 판단을 했다. "지금 우리는 강병 10만 명이 있으니 모두 일당십의 용사들이오. 북을 울리며 진나라를 멸합시다. 잘되면 한고조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지라도 조조의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한나라는 오랫동안 천하를 다스리면서 은덕을 베풀었소. 명분으로 말하면 나는 한실의 생질에 해당하오. 형이 패망한 상황에서 동생이 뒤를 잇는 게 정리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오." 이렇게 5호의 첫 국가 한漢나라가 건국된다. 흉노 유연은 진혜제 영흥 원년(304), 좌국성에서 한왕을 칭하며 한나라 제도를 좇아 백관의 제도를 정했다. 16국 중 첫 왕조의 건국이었다. 한나..
2018년 7월 오사카 여행 중 방문한 일본 세계문화유산 니조성 도보 코스 소개합니다. 전체 니조성 지도는 다른 포스트[바로가기] 참고해 주시고 이 포스트에선 총 4곳 사진 소개합니다. 동쪽 성문동남 모퉁이 망루당문모모야마문 일부 지도로 보면 아래 4곳입니다. 1~3번이랑 왼쪽 모모야마문입니다. 입구에서 표 사는 것 부터 소개 시작할게요. ◆ 1. 입구에서 입장권 사고 니조성 들어가기 어른 : 600엔중고생 : 350엔아이들 : 200엔 니조성은 평일 오전에 방문했습니다. 입구엔 관광객들이 많아서 북적북적했어요. 입구에는 일본 세계문화유산 니조성 동쪽 성문 앞의 넓은 광장과 간략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표소 근처에는 쇼와25년(소화昭和25년 1950년)에 만들어진 커다란 비석이 있습니다. 역사 유..
한나라 건국 시조 위진남북조 흉노 유연, 사마영 실수 [12화] 후한 건안 21년(216), 조조가 흉노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좌, 우, 남, 북, 중앙의 5부로 나눠 부마다 1명의 도위를 두고 중앙에선 사마를 파견해 이들을 감독했다. 1만여 부락민을 거느린 좌부는 부씨현(산서성 임분현)에 거주.6천여 부락민을 거느린 우부는 기현(산서성 기현)에 거주.6천여 부락의 중부는 대릉현(산서성 문수현)에 거주. 이로써 분수 일대는 남흉노 3만여 부락이 사살싱 점령한 셈이 되었다. 중원으로 들어온 흉노 19개 부족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도각, 강서, 노수호 부족이 있었다. 이중 도각부는 한고조 시절부터 흉노로 공주들을 시집보냈기에 귀족들이 유劉를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에서 오래 살았던 탓에 한화가 많이..
한나라 소제 시기 上 권세가 곽광, 황제와 상관걸 사이에서 곽거병이 도성으로 데리고 와 낭관부터 시작해 계속 승진해 봉거도위奉車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됐고, 궁중에서 20여 년간 봉직했다. 그는 항상 신중했기에 어떠한 실수도 범한 적이 없어 군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한 소제가 즉위했을 때에는 나이가 여덟 살에 불과했기에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고명대신 중의 우두머리인 곽광이 주재했다. 곽광 또한 신중하고 충성스러웠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아예 궁중에서 살았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앉든 간에 규칙적이어서 조금도 바뀌는 경우가 없었다. ◆ 전한 소제 초기 이 때문에 소제가 어리기는 해도 나라는 태평했다. 이듬해에 곽광이 안륙후에 책봉되고, 상관걸上官桀은 안양후에 책봉되었는데, ..
중원으로 진출한 강남 사족, 호족들과 육손 손자 육기 육운 [11화] 한편으론, 변방으로 취급받던 강남 사족들의 중원 진출도 빈번했다. 중원은 중국의 중심이고 아직 발전이 더뎠던 강남의 사족들은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사대부들의 무시를 받기 일쑤였다. 당시 『중원으로 이주』한 강남 사족을 대표하는 이가 육손의 손자이며 육항의 아들이었던 육기, 육운 형제였다. 오나라가 멸망하자 사공 장화는 명망이 높던 저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륙(육기, 육운)은 용이 강한江漢에서 뛰어오른 것 같고, 언선(고영)은 봉이 조양朝陽에서 우는 것 같았소." 그럼에도 중원 명문가들은 강남 사족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육기가 처음 낙양에 갔을 때 장화에게 자신이 앞으로 인사하러 가야 할 곳을 물었는데 유보가 그..
일본 교토 여행 중 니조성을 들렀을 때 받은 안내 책자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고미즈노오 천황의 행차 도쿠가와 가문의 지위를 다지기 위해 2대 쇼군 히데타다의 딸 가즈코가 1620년 고미즈노오 천황의 중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1619년에 일본 교토 니조성의 수리가 이루어졌고 1620년 6월 18일 낳은 종자들과 함께 니조성에서 황궁으로 향했다. 1626년 이미 은퇴한 2대 쇼군 히데타다와 3대 쇼군 이에미쓰는 일본 교토 니조성을 방문하여 5일간의 고미즈노오 천황의 행차를 맞이했다. 니조성은 행차를 계기로 1624년에 확장되어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 천수각과 행차 궁전, 혼마루 궁전 등이 축하를 위해 증설되었다. 쇼군 전속 화가인 가노파가 장려한 벽화를 그렸다. 행차에 맞추어 가면극과 단가, 전통음..
일본 교토 니조성 지도 설명합니다. 자료는 니조성 여행 갔을 때, 받았던 니조성 설명 책자에서 발췌했습니다. 책자에 나온 전체 지도는 아래에 있으며, 걷는 코스 1번부터 9번까지 설명합니다. 사진 촬영 추천 포인트 : 카메라 모양 3, 5, 7, 8번니조성 내부 찻집 : 8번, 청류원 향운정기념품 / 찻집 : 1번 동쪽 성문과 400년 기념 전시관 사이 그리고 휴게소는 니조성 돌담, 청류원, 녹색 정원 옆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른들만 하는 연기 태우기 가능하며 자판기도 있습니다. 1. 동쪽 성문니조성의 정문으로 1662년경에 만들어졌다. 축성 당시는 지금과 같이 망루 아래문(2층)이었으나, 간에이(1624-1644년) 시대 니조성 행차 당시는 천황을 2층에서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개조되었다고 한다. 2...
니조성 여행 중 받은 안내 책자 소개합니다. 국보 유형문화재 보호를 위해 궁전 내 촬영은 금지되어있습니다. 일본 블로거, 방송 자료를 50장 정도 첨부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 글은 아래 책자에 담긴 1~10번 순서대로 진행합니다. 이 숫자는 실제로 니조조 니노마루고덴(니조성 니노마루 궁전)의 도보 관광지 코스입니다. ◆ 국보 니노마루 궁전 니노마루 궁전에는 에도시대 초기(1603-1867)의 건축양식인 쇼인즈쿠리가 도입되었다. 니조성에 현존하는 유일한 궁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궁전 안은 가노파의 그림과 방과 방 사이에 섬세하게 조각된 문 상단 조각, 곳곳에 장식된 호화로운 장식구 등 쇼군의 거처에 어울리는 화려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 니노마루 궁전의 장벽화 니노마루 궁전에는 3,600점 이..
일본 교토 여행 중 한글어로 된 니조성 소개 책자를 소개합니다. 옛 별궁 니조성, 세계유산 도쿠가와 가문의 흥상성쇠와 일본 역사의 변천을 간직해 온 니조성 ◆ 니조성의 역사 축성 후 400년 동안 일본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들과 함께 해온 니조성. 니조성은 에도막부(1603-1867)의 창시자이자 초대 쇼군인 도구카와 이에야스 명으로 1603년에 완성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일본을 통일하고 26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룩했다. 이에야스 이후 15대까지 이어진 에도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한 시대였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통일했고 1603년에 이에야스는 천황의 명으로 쇼군이 되었다. 그후 이에야스는 니조성에 모인 영..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발췌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출판사 중국 본토는 대게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으로 크게 나뉜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 명명되며 건조도가 높아 삼림이 충분히 생육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삼림이 자란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채벌되면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회수 이북에는 삼림지대가 형성되기 힘들었고, 이에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은 화북의 대평원은 전망이 좋고, 공간이 열려 있어 집단의 이동이 쉬웠다. 또한 치수가 어렵기로 유명한 황하의 물을 거의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소규모 관개와 자연의 천수를 주로 이용하는 소위 소관개 천수 농경 지대였다. 뜻밖에 농사에 가혹한 환경에 처한 ..
벽제관 전투 및 겁쟁이 선조실록 기록 (1593년 2월 5일)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선조실록 1593년 2월 5일 (벽제관전투 22일 전) 선조실록 - 접대도감 보고 “남방 군사의 천호千戶 오유산이 징발로 말하기를 '지난달 27일에 관군(이여송의 명나라 군대)이 귀국 초병哨兵의 허튼 보고에 속아 왜적은 이미 물러가고 경기 지방은 텅 비었으려니 생각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었다. 그런데 왜적이 미리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길이 끊기고 포위당하여 습격을 받았다. (벽제관전투 패배도 사실 정보력의 패배임) 그리하여 왜적을 참수하기는 겨우 1백 20여 명 했는데, 대국 군사의 사상자는 1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독 이여송은 지금 임진강 가에 머물고 있는데 눈이 저렇게 내리니 반드시 개성으로 후퇴하..
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 잔혹했던 왕준은 업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으며 선비족 사병들이 약탈한 부녀가 행군에 걸림돌이 되자 역수에 밀어 넣어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자만 8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의 기병에 대한 공포가 천하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양을 점거했던 장방 또한 매우 교만했다. 낙양 일대를 약탈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후궁과 궁녀들을 겁탈하거나 황실의 귀중품을 훔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진혜제를 압박해 사마영의 황태제 신분을 폐하고 예장왕 사마치를 황태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리게 했으며 함부로 장안 천도를 거행했다. 진혜제의 형제는 25명이었으나 이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사마영과 사마치, 오왕 사마안 밖에 ..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예를 받아들인 강남 호족들, 그 이유는? 서진은 팔왕의난을 기점으로 국운이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리고 사마씨 왕들 사이에 의심이 만연하게 퍼지죠. 팔왕의난 최종 승자는 동해왕 사마월이지만, 그도 결국 자신이 끌어들인 이민족의 손에 제거됩니다. 그 유명한 영가의난 당시에 말이죠. 강남으로 이주한 사마예는 황위 계승권에서도 멀고, 그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없던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예를 의심해 끊임없이 속박하고 낭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했습니다. 그렇게 험난한 시기를 넘어 기어코 강남으로 이주하여 동진 건국자 동진 원제로 추앙받습니다. (결국 강남의 주인이 된 것은 낭야왕이 아닌, 낭야 왕씨 일..